타락 천사, 검은 천사
이 제목을 처음 떠올렸을 때, 나는 6년 전쯤 파리 오르세에서 봤던 Sade 백작 관련 전시를 생각했다.
악명 높은 사드 백작의 고어하고 변태적인 소설과 오래된 명화들을 엮어서 재해석한 전시였다. 전시의 큰 주제는 데카당스였다.
나는 항상 기이하고 이상한 것,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에 끌렸다. 에로틱과 퇴폐가 함께 나열된 그 전시는 내게 크게 영감을 주었다.
내가 프랑스에서 보낸 몇 년의 시간이 모두 이 전시를 보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때 사드 전 제목은 <L’Attaquer du Soleil> ‘태양의 역습’이라는 제목이었다. 그런데 왜인지 나는 이 전시 제목을 <타락 천사>, 불어로는
<L’Ange Noir> 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해 보니 비슷한 시기에 오르세에서 열렸던 <L’Ange du Bizarre>라는 전시와 헷갈렸다. 명화 중 타락 천사를 그린 그림만 모은 전시였다. 그런데 ‘L’Ange du Bizarre’는 직역하자면 ‘이상한 천사’라는 뜻이다. 정확히 타락 천사라는 뜻이 아니었다.
사전을 찾아보니 ‘타락 천사’는 불어로 ‘L’Ange Déchu’였다. 직역해도 그대로 타락 천사라는 뜻이다. ‘Déchu(데슈)’는 ‘타락한’이라는 뜻인데
‘Déçu(데슈)’와 발음이 언뜻 들으면 비슷하다. ‘Déçu’는 ‘실망한’이라는 뜻이다. 언뜻 들었을 때 ‘실망한 천사’라고 들려서 이것 또한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중 어디에도 내가 기억한 ‘L’Ange Noir’ -검은 천사- 라는 단어는 없었다.
왜 나는 타락 천사를 L’Ange Noir-검은 천사라고 기억했을까?
내 무의식은 ‘타락 천사’를 ‘타락한 천사’나 ‘이상한 천사’ 혹은 ‘실망스러운 천사’도 아닌 ‘검은 천사’라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는 나의 착각에서 기인한 이 단어를 전시의 제목으로 정했다. 검은 천사라는 단어는 우리와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레즈비언은 검은 옷을 입는다.’
우리들끼리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있다. ‘레즈비언들이 모이면 모두 검은 옷만 입고 있다’라는 것이다. 과장이지만 사실이기도 하다.
왜 그런지 여성 퀴어들은 검은색 옷을 주로 입는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면 검은색은 멋스럽기도 하지만 가장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그들을 보면서 내가 ‘타락 천사’라는 단어를 ‘검은 2021. 2. 3.’로 인지했을지도 모른다.
타락 천사는 탈락하고 배제된 천사이다. 눈에 띄지 않고 명명되지 않은 존재, 아직도 많은 가시화가 필요한 존재, ‘타락’과 ‘천사’라는 정반대의 단어로 조합된 기이한 존재.
여성, 미성년자, 퀴어, 비혼, 그리고 이런 단어로 묶이기조차 어려운 사회 속에서 숨겨진 혹은 소외된 여성들이 내겐 타락 천사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PUXXYBERRY
‘푸시베리’는 내가 만든 공간이다. 여성 전용 섹스토이샵과 카페 바를 동시에 운영한다. 분홍색 벨벳과 골드 프레임으로 도배된 작지만 화려한 공간이다. 분홍색이 여성에 대한 편견을 고착시킨다는 비난도 받았지만, 내가 굳이 분홍색을 고집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내게 분홍색은 에로틱한 느낌을 준다. 생살 같기도 하고 빨간색보다는 조금 귀엽고 상기된 볼이나 촉촉한 입안 쪽 살 같은 게 떠오른다. 연약하고 그저 예쁜 색이라는 인식의 분홍색을, 좀 더 강렬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선택한 마젠타와 핑크 사이의 색상으로 이 공간을 도배했다. 살 같기도 하고 털 같기도 한 벨벳으로. 그리고 곧 이 공간은 여성 퀴어들이 점령했다. 당연한 수순처럼.
우리는 이곳에서 많은 사건과 추억들을 만들었다. 푸시베리는 여성의 성적 욕망을 드러내는 공간이자 동시에 여성들끼리 ‘여성애’를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공간이다. 우리는 타락한 검은 천사들처럼 모여서 여성애를 베이스로 한 다양한 드라마와 추억들을 이곳에 수놓았다. 우리 모두의 소중한 공간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
이곳의 주인이자 여성퀴어인 정두리와 이곳의 단연 단골이자 여성퀴어 조은후가 함께 이곳에서 창작물을 전시한다. 이곳에서 나눈 기억이 있는 두 작업자는 각자 젠더와 섹슈얼을 주제로 작업을 전시한다. 이 공간이 가진 이야기와 두 작업자가 해온 작업의 맥락이 맞아떨어지는 이 순간, ‘푸시베리’는 더는 우리들만의 비밀스러운 공간이 아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억과 경험들로 이루어진 창작물들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타락한 검은 천사들-을 가시화시키는 공간으로 확장한다.
전시를 기획하며
정 두리
2021. 2. 6.
'Mon Travail > ANGE NOIR 타락천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자들의 혀만 남았다> "타락천사 L'ange Noir" 전시에 부쳐 (0) | 2021.02.22 |
---|---|
<ANGE NOIR> COLLAGE SERIES (0) | 2021.02.22 |
ANGE NOIR STATEMENT (0) | 2020.12.30 |